디지털 기록은 이제 기억을 넘어 ‘존재’를 구성한다. 그렇다면 그 존재를 지워주는 서비스가 생긴다면? ‘삭제’가 선택지가 된 미래, 우리는 왜 사라지려 하는가?
기억이 아닌, 존재 자체를 지운다는 것
2040년, '기억 삭제' 기술이 진화한 끝에, 단순한 데이터 삭제를 넘어 디지털 존재 자체를 말소하는 서비스가 등장했다. SNS 계정 폐쇄, 금융 기록 삭제, 온라인 활동 로그 제거는 기본. 이제는 사람의 생체 인식 정보와 연관된 모든 클라우드 기반 기록까지도 완전 삭제가 가능하다. 이 기술은 단순한 해킹이나 도피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합법적인 ‘디지털 사망’ 서비스로 진화했다. 사람들이 이 서비스를 찾는 이유는 다양하다. 관계의 피로, 과거의 낙인, 데이터로 남아있는 실패한 자아. 그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간절한 욕망. 기술은 그 욕망을 충족시켜준다. 단, 완전한 대가를 요구한다. 삭제된 자아는 복구되지 않고, 새로 만든 정체성은 과거와 단절된다. 우리는 이제 누구나 한 번쯤은 존재를 지우는 선택을 고민할 수 있는 시대에 들어섰다.
왜 사람들은 사라지려 하는가?
과거에는 자살이나 은둔처럼 현실에서의 이탈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제는 훨씬 정교한 방식으로 ‘존재를 초기화’할 수 있다. 가장 흔한 동기는 '정보 피로'다. 수천 장의 사진, 수백 개의 계정, 끝없는 인증과 추적. 자신도 통제하지 못하는 디지털 흔적이 너무 많아졌고, 그것이 정체성의 부담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이유는 관계의 리셋이다. 악플, 온라인 괴롭힘, 연애의 흔적, 실패한 창업. 사람들은 점점 더 "지우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말한다. 과거의 흔적은 더 이상 추억이 아니라 족쇄가 되었고, 기술은 그런 요구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존재 삭제는 도망이 아니라 ‘다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다. 다만, 그 선택은 단순히 계정을 지우는 것 이상의 철학적 결정을 포함한다. 나를 이루는 기억이 사라졌을 때, 나는 여전히 나인가?
존재 삭제 이후, 인간은 누구인가?
삭제된 존재는 법적으로도 ‘다시 태어난 존재’로 간주된다. 신분은 바뀌고, 금융과 의료 이력은 초기화되며, 사회적 관계도 완전 단절된다. 일부는 이 과정을 통해 새로운 도시에서 다른 이름으로 새 삶을 시작한다. 처음에는 해방감이 크다. 과거의 실수도, 실패도, 관계도 사라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나의 과거가 사라졌다는 상실감"이 스며든다. 모든 걸 버리고 시작한 사람은, 어느 순간 자신이 "진짜였던 적이 있었는가?"라는 혼란을 겪는다. 인간은 과거로 구성된 존재다. 아무리 과거를 지우고 싶어도, 정체성은 기억의 궤적 위에 쌓인다. 존재 삭제는 그 궤적을 절단하고 새로 그리는 시도지만, 때로는 그 단절이 자기 해체로 이어질 수 있다. 결국 기술이 허락하는 완전한 리셋은, 인간에게 새로운 기회이자 감당해야 할 공허이기도 하다.
결론
존재 삭제는 단순한 도피가 아닌, 정체성의 재설계다. 그만큼 위험하고 매혹적이다. 당신이 지우고 싶은 것은 진짜 과거인가, 아니면 과거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현재인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진짜 ‘리셋’은 시작된다.